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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감각을 깨우는 예술가, 필립 파레노 Philippe Parreno

some wind 2018. 12. 23. 2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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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aught Times: For Eleven Months of the Year it’s an Artwork and in December it’s Christmas (April), 2011

거리가 반짝이는 전구들로 물들고, 매서운 겨울바람에 아랑곳않고 울려퍼지는 캐롤에 들뜨는 주말이다. 시내를 돌아다니는 모두가 기독교도 아니고, 성탄절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데도 “메리 크리스마스”를 외치며 안부를 묻고 약속을 잡는다. 무엇이 우리를 이토록 설레게 만드는 걸까?

물론 그리스도의 탄신일이라는 종교적인 의미가 중요하게 다가오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크리스마스는 지금 기독교 국가가 아닌 나라에도, 12월에 따뜻한 나라들도 모두 즐기는 전세계인들의 축제가 되었다. 연말연시를 환하게 밝히는 형형색색의 조명들과 신나는 노래, 깜짝 선물과 카드를 주고받는 일들은 한 해의 마무리와 새로운 해의 시작을 맞이하는 설레는 기분을 더욱 증폭시킨다.크리스마스를 기념하던 본래의 의미가 전환되어 새로운 의미로 소통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이렇게 크리스마스를 즐기고 일상으로 받아들이며, 크리스마스라는 키워드가 생성해내는 예상치못한 다양한 형태의 사건들에 우리도 의식하지 못할정도로 자연스럽게 참여하고 있다.  

Anywhen, 2016

커다란 10개 가량의 높낮이가 변화하는 스크린과 벽면에 설치된 여러개의 번쩍이는 조명들, 스크린을 비추는 신비로운 영상들과 음향, 하늘을 떠다니는 물고기 풍선까지 지금 런던의 현대 미술관인 테이트 모던 입구의 거대한 전시 공간인 터빈 홀(Turbine Hall)은 필립 파레노(Philippe Parreno)의 작품으로 가득 채워져 있다. 

사람들은 공원에서처럼 그 공간 안에서 누워있거나 앉아있기도 하고, 물고기 풍선을 만져보며 자신의 방법대로 작품을 감상한다. 시각, 청각, 촉각 등 여러 감각을 자극하는 작품들이 어우러져 만들어내는 공간은 관객들이 단순히 미술품을 보고 지나가는 것이 아니라, 그 자리에 머물러 참여하고 새로운 관계를 형성함으로써 작품으로 재탄생한다. 관객들의 움직임에 따라 생기는 그림자와 실루엣, 누워있는 모습들 또한 작품을 색다르게 만들어준다. 관객을 포함한 전시 자체가 하나의 오브제로서의 기능을 하는 것이다.

파레노의 작품은 ‘관객’이라는 말 보다는 ‘대중’을 대상으로 한다. 파레노는 관객은 어떤 목적이나 이벤트를 위해 계획될 수 있지만, 대중은 어떠한 계획도 기대되는 것도 없다고 말한다. 바로 그 기대하지 못했던, 그리고 예기치 못한 상황들을 전시를 체험하는 관객들과 작품이 상호교류하며 만들어내고, 작가는 다양한 형태의 생성의 ‘장(場)’을 만들어 내려고 한다.

필립 파레노(Philippe Parreno)

알제리 계의 프랑스 예술가 필립 파레노는 사회적 맥락이 개개인에 의해 변화하고 상호간에 소통하는 가능성을 주로 영상, 음향, 조각, 퍼포먼스, 조명 등의 설치 작품들을 통해 열정적으로 탐구하는 예술가이다. 1990년대 등단한 작가로 인간과 사회적 맥락의 관계를 중시하는 ‘관계 미학(Relational Aesthetics)’을 대표하는 작가 중 한명이다. 

따라서 파레노의 작품들은 관객들이 참여하여 완성해 나가는 구도를 띄고 있으며, 어떠한 의도된 형태의 행위가 아닌 관객 스스로가 작품을 만나고 자기 스스로 체험하는 과정에서 생기는 예술 형태의 변화에 주목한다. 

Danny The Street, 마키(Marquee) 시리즈, 2006~

마키(Marquee)는 미국 극장 간판이나 입구 쪽에 사람들의 시선을 끌기위에 장식해 놓은 조명이 달린 차양을 말한다. 전시장 양 쪽으로 늘어선 마키들은 마치 극장가 거리를 연상시킨다. 이 거리의 재현은 대니 더 스트릿(Danny the street)이라는 제목이 붙었다. 디씨 코믹스(DC Comics)라는 만화에 등장하는 자기 스스로 원하는 곳으로 이동할 수 있고, 모습을 변형할 수 있는 거리의 이름에서 따 온 것이다. 

아무런 극장명도, 상영되는 극의 제목도 표기되어 있지 않고 조명이 깜빡거리며 화려한 존재감을 드러내는 마키들은 관객들의 상상에 따라 여러 극장들이 되어 나타나기도 하고, 빛 그 자체로의 경험을 제공하기도 하며, 관객들에 의해 생성되는 그림자들로 또 다른 형태를 끊임없이 만들어낸다. 4분 30초의 간격으로 전시장에 울려퍼지는 클래식 음악과 불현듯 들려오는 뉴욕 거리의 소음은 전시장의 공간을 순식간에 뒤바꿔 놓기도 한다.

Speech Bubbles, 2009

전시장 천장이 전시 공간에 따라 까맣거나 또는 금색, 흰색의 ‘말풍선(진짜 말 그대로의 말풍선)’으로 가득 차 있다. 우리가 일상 속에서 하고 싶지만 하지 않았던 말, 무수히 생각났다가 지워지고 또 떠오르는 수많은 말들이 아무 것도 적히지 않은 말풍선들로 시각화되어 천장을 가득 채우고 있다. 생각에 한계가 있을까? 파레노의 말풍선들은 그 무엇이든 될 수 있는 예술과 언어의 무한한 가능성을 시사하며 인간과 인간과의 소통, 인간과 사회, 예술 간의 소통에 대해 이야기한다.

파레노는 매체의 한계를 해체하려는 다양한 시도를 하고 있다. 사진, 영상, 설치 등의 방법적인 면에서의 매체 뿐만 아니라 관객의 참여 행위와 다른 예술가와의 협업 또한 예술적 형태라고 본다. 파레노는 피에르 위그(Pierre Huyghe), 티노 세갈(Tino Seghal) 등과 영상 작업을, 피아니스트 미하일 루디(Mikhail Rudy), 음향 디자이너 니콜라스 베커(Nicolas Becker) 등 여러 뮤지션들과 협업한 바 있다.

Ann-lee

<Ann-lee>는 다양한 협업으로 이루어진 대표적인 작품 중 하나이다. 파레노는 1999년도에 피에르 위그와 함께 일본의 한 애니메이션 캐릭터의 판권을 샀다. 티노 세갈이 “Ann lee”로 이름 붙인 캐릭터가 말을 하고 움직이는 애니메이션 영상을 만들었고 거대 스크린에 전시를 한다. 이 영상이 끝나면 한 소녀가 나와서 관객들에게 말을 던진다. 

“What do you believe, your eyes or my words?”

파레노의 작품들은 일관성이 없는 다양한 형태로 이루어져 있지만 특정한 공간성과 시간성을 반영하거나 모호하게 만들며 참여와 경험을 통해 생성될 수 있는 무한한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 파레노 전시 타이틀로 자주 등장하는 “Anywhen(언제든)” 과 “Anywhere(어디든)”과 같은 단어에서도 마찬가지다. 파레노는 기존의 사회와 사회적 의미들을 부정하는 게 아니라 시공간을 인식하고 그 속에서 소통하고 경험하며 순간순간을 의미있는 생성으로 만들고자 하는 것 같다.

질 들뢰즈

프랑스 현대 철학자 들뢰즈(Gilles Deleuze)는 순간순간의 변화 자체인 사건을 가장 중요한 것이라고 여겼다. 사물로 규정되지 않는  비물체적인 모든 사건들이 세계의 표면에서 발생하며 이 수많은 사건들이 일어남과 동시에 의미를 갖게 된다. 이 의미를 가진 사건들이 우리의 삶과 현실을 가득 채우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누군가를 만나거나 냄새를 맡고, 하늘을 보고, 음악을 듣는 것, 감정의 변화와 같은 것들 모두가 바로 비물체적인 하나하나의 사건들이다. 

들뢰즈는 이 사건들이 현실에 생성되기 전에 무한한 잠재성을 내포하고 있다고 보았고, 하나하나가 가진 특이성이 어떤 계열을 이루면서 사회의 구조와 사회적 맥락이 형성된다고 보았다. 파레노는 현실의 구체적인 사건 하나하나를 작품으로 현실화 하는 것이 아니라 잠재되어 있는 수많은 사건들이 어떤 형태로 현실에 드러날 수 있는지에 대한 즐거운 상상과 체험을 제공한다. 

파레노의 전시를 관람할 때 온 몸의 감각을 깨우고 시공간의 순간순간의 변화에 주의를 기울이게 되는 것처럼 거리 곳곳에서 예기치 못한 즐거움과 사건들을 만날 수 있었던 크리스마스를 지나보내며, 올해는 어떤 사건들로 마무리 되고, 내년은 또 어떤 사건들이 내 삶을 채울 것인지 즐거운 마음으로 체험하고 참여할 수 있기를 바래본다.

군중, 2015


2016. 12. 26  |  Artists  |  SEOH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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