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inds/들뢰즈

안티 오이디푸스 | 1장 4절 유물론적 정신의학 정리

some wind 2022. 7. 9. 19:28
반응형
안티 오이디푸스  |  들뢰즈 & 과타리, 김재인 옮김, 민음사
1장 욕망 기계들
4절 유물론적 정신의학 (54-73)

*들뢰즈, 과타리를 구분하지 않고 들뢰즈로 통칭했다. 사실 어디서 구분되는지도 잘 모르겠다.

 

일단 1장 1절 읽을 때부터 무슨 말인지 하나도 모르겠었는데, 4절을 읽는 지금도 여전히 하나도 모르겠다. 그래도 일단 내일이 스터디니까 열심히 정리해보기로 한다...(소제목만 먼저 내리 다 썼는데 답이 없다 큰일..)

 


무의식과 생산의 범주 (54-55)

전체적 체계적 성격의 망상은 부분적 국지적 자동증들에 비하면 2차적이다  _정신의학자 클레람보(54)

 

...후..

 

들뢰즈는 클레람보의 명제에 대해 동의하는 듯 하면서 다시 까고 있다. 이건 들뢰즈가 갖고 있는 글쓰는 패턴같은 건데 꼭 처음에는 자기가 가져오는 레퍼런스가 맞는 것처럼 굴다가 마지막에 가서는 다 틀렸다고 까는 편이다. (차이와 반복에서 많이 당함)

 

클레람보는 말에 있어서 반복음, 무성음의 유성화, 돌발음, 무의미음 등의 음성 현상들을 <(정신적) 자동증>으로 지칭했고, 이런 현상에서 감염 내지 중독의 기계론적 결과를 보았다. 이 결과가 망상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들뢰즈는 클레람보가 이러한 자동증에서 "욕망 기계들을 작동시키는 경제적인 생산의 경과"를 보지 못했다고 깐다. 그러면서 "참된 유물론적 정신의학은, 기계론에 욕망을 도입하기, 욕망에 생산을 도입하기라는 이중작업으로 정의된다"고 말한다.

 

소제목으로 말하자면 무의식도 생산의 범주에 있다는 것.

 


극장이냐 공장이냐? (55-56)

여기서는 관념론의 전형적 형식과 가짜 유물론 사이에 별 차이가 없음을 밝힌다. 이것도 까기 위한 글이다.

 

분열증 이론의 특징 - 3가지 개념

(1) 해리(크레펠린) : 설명적 개념(인과 관계). 분열증에 특유한 장애나 1차적 결손을 지적하려 한다.

(2) 자폐증(블로일러) : 이해 돕는 개념. 분열증 결과의 특유성 지적. 망상 또는 절단.

"현실에서의 이탈은 내적 삶의 상대적 또는 절대적 우위를 수반한다"

(3) 시-공간 또는 세계-내-존재(빈스방어) : 표현적 개념. 망상하는 인간을 그의 특유한 세계에서 발견 또는 재발견.

(1-3) 공통점 : <몸의 이미지(정신의 마지막 아바타)>를 매개로 분열증 문제를 자아에 관련시킨다.

 

들뢰즈는 분열증에서는 자아가 해체되지만, 분열증을 설명하는 개념들은 여전히 몸의 이미지를 매개로 자아에 관련시키고 있음을 지적한다.

 

특히 프로이트를 많이 지적하고 있는데, 그가 '자아'라는 관념을 떠나지 못하는 이유는, 자신이 창조한 삼위일체 <오이디푸스, 신경증, 아빠-엄마-나>공식을 버릴 수 없기 때문이다. 들뢰즈는 이렇게 말한다. "프로이트는 분열증에 적용되는 자폐증이라는 난처한 개념을 재발견하고 이것을 그의 권위로 보증했는데(근거를 자신의 권위로 들다니..너무 웃기고 대단), 그를 여기로 인도한 것은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의 정신분석적 제국주의가 아니었는지 따져 보아야 할 것이다."(p.56)

 

자아는 엄마-아빠처럼 분열자가 오래전부터 믿지 않는 것이다. 자아는 엄마-아빠라는 문제들 너머에, 그 뒤에, 그 아래에, 다른 어디에 있지만, 그 속에는 없다. (55)
나는 더 이상 나라고 말하지 않을 거야. 절대로 그 말을 쓰지 않을 거야. 그건 너무나 바보 같은 짓이야. 내가 그 말을 알아들을 때마다 나는 그 말 대신 삼인칭을 쓸 거야. 내가 거기에 대해 생각한다면 말이야. 그게 저들을 즐겁게 해 주면 말이야. 그건 아무것도 바꾸지 않을 거야. (56)
이건 웃겨서..

 

그리고 프로이트의 분열자에 대한 소회를 언급하는데 이것도 매우 웃기다.

 

프로이트가 말하기를, 분열자는 낱말을 사물로 여기며, 무감동하고 나르키소스적이며, 현실에서 절단되어 있고, 전이가 안 되며, 철학자를 닮았는데, 철학자를 닮았다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56)

 

이어 충동-징후의 관계, 상징-상징된 것의 관계를 분석적으로 착상하는 방식에 대해서 본격적으로 의문을 제기한다. 인과 관계, 이해 관계, 표현 관계로 과연 설명할 수 있을까? 들뢰즈는 이 의문이 근본적으로 잘못 되었다고 지적하는데, 앞선 설명들은 "오이디푸스를 기준으로" 이루어지고 있고, 이에 따르면 생산이라는 본래적 유일 관계가 제거되어 정신분석의 위대한 발견인 "욕망적 생산, 무의식의 생산들의 발견"을 드러낼 수 없다는 것이다. 

 

이로 인해 공장(생산)으로서의 무의식고대 극장(재현)으로 대체되고, 무의식의 생산 단위들은 재현으로 대체되고, 생산적 무의식은 자신을 표현하는 것만 가능한 무의식(신화, 비극, 꿈 ...)으로 대체되었다.(57)

 

 

신화나 비극, 꿈이 갖는 상징적 힘을 꽤나 좋아하는 편이다. 그것들에는 강력한 힘이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신화나 비극, 꿈이 드러나는 방식이나 그 결과가 무의식과 일치한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무의식의 내용물을 담는 그릇이자, 형식일 뿐이다. 다만 무의식을 담아내는 것들 중(사실 인간이 하는 모든 행동과 말, 만들어내는 모든 것에는 무의식이 담겨 있는 것이 아닐까?) 가장 그 생산 절차가 무의식의 방식과 비슷하고, 응축된 상징성을 지니고 있고, 개인적인 것보다 집단적이고, 그래서 강력한 힘이 있는 형식이다. 그래서 개인적인 무의식을 탐구하는 데에도, 집단의 무의식을 탐구하는 데에도 좋은 도구라는 생각이 드는 것이고, 이런 명확한 관점으로 바라보지 않고 신화, 비극 꿈이 담아내는 내용물들을 1차적으로 곧이곧대로 받아들이는 것은 위험할 수도, 또는 오독과 오해의 여지가 많을 것이라 생각한다.

 

오이디푸스라는 틀 안에서 사유하기 시작하면 그것에 맞추어서 모든 것이 해석되기 마련이다. 이 부분을 보면서 어류란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가 많이 떠올랐다. 인간의 편의를 위해서 틀을 상정하고 그 안에 모든 것을 끼워 맞추다 보면 이미 존재하고 있는(무의식의 생산의 범주와 같은) 것들을 은폐하고 보지 않으려 애쓸 수밖에 없다. 그런 데에 에너지를 쓸 바에야 들뢰즈가 주장하는 것처럼(보이는 것처럼) "생산"이라는 형식에 집중해서 세상을 바라보는 것이 정신적인 건강 측면에서도 좋지 않을까. 프로이트의 연구가 대단한 것과는 별개로(개인적인 감탄) 자신이 부여한 질서를 고수하려는 면에서 바람직한 학자는 아닌 것 같다. 근데 사실 철학자가 그렇지 않나? 결국 자기 자신이 분열자였던 것은 아닐까. (ㅎ)


생산과정으로서의 과정  (57-58)

 

위에서처럼 분열증의 문제를 자아에 귀착하면 할수록, 인과, 이해, 표현 같은 관념적 형식들에 관련시킬수록, 분열자는 [들뢰즈가 가장 매력적이라고 강조한] "존재하기를 멈춘 적 없이 특유하게 자기 세계에 존재해 온 자아"로 보인다. 여기서 들뢰즈는 맑스의 경고를 상기하자고 한다. 

밀의 맛에서 누가 그것을 재배했는지 알아맞힐 수 없고, 생산물에서 생산 체제와 생산관계들을 알아맞힐 수 없다.

 

"생산물을 그것이 의존하는 현실적 생산의 경과"가 아니라 "자폐증"이라는 결과로 일반화하여 과정을 정지하거나, 과정을 하나의 목표로 만들거나, 과정을 무한히 공전시키면 시킬수록 분열자는 그만큼 더 특유한 존재로서 인물화되어 나타난다고 말한다.(57-58) 이는 우리가 자폐증을 갖고 있는 사람들에 대해 갖는 일반적인 인식만 봐도 이해하기가 쉬울 것 같은데(<이상한 나라의 우영우>라는 "자폐"라는 장애에 사람들이 갖는 일반적인 인식이 드라마에서 표현된 것만 보더라도(하지만 우영우 너무 능력자고, 주변 사람들도 그걸 인정해줘서 너무 좋음(이상적이어서))), 그 사람이 실제로 이행하고 있는 생산과정이 아니라 자폐증이라는 증상으로 드러나는 형식적 측면에 초점이 간다

 

생산의 물질적 과정을 설정하자마자, 생산물의 특유성은 사라지고, 동시에 또 하나의 <완성>가능성이 나타난다.(58)

들뢰즈는 <생산의 물질적 과정>, 즉 <생산물을 그것이 의존하는 현실적 생산의 경과>로 이해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드디어 하고 싶었던 말을 꺼낸다. "분열증은", "욕망과 욕망 기계들의 생산과정이다"

 

왜 사람들은 하나에서 다른 하나로 이행할까? 이 이행은 불가피할까? 이것은 지금도 여전히 중요한 물음이다. (58)

나에게 이 질문은 동일성에 대한 도전처럼 느껴진다. 이 질문에 대해 야스퍼스의 지적을 귀중하다고 언급했는데(과연 이번에는...) 그의 <관념론>이 비전형적이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야스퍼스는 과정을 단절, 침입과 같은 것으로, 자연 속 <악령>과 관계있는 것으로 해석한다. [들뢰즈는 역시 여기서도 비판점을 찾아내는데] "과정을 경제적, 물질적 현실로, 자연=산업, 자연=역사의 동일성 속에 있는 생산과정으로 착상"하지는 못했다고 지적하고 있다.


결핍으로서의 욕망이라는 관념론적 착상(환영) (58-59)

이제 점점 힘들어서 간단하게 정리해보려고 한다. (사실 소제목에 다 요약되어 있는 거 아님..?)

 

들뢰즈는 계속해서 초점을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 문제를 완전히 다르게 해석할 수 있다고 강조하는 것 같다.

 

욕망을 생산과 획득 중에 획득에 두면 하나의 관념론적(변증법적, 허무주의적) 착상을 갖게 되며, 욕망을 현실적 대상의 결핍으로 규정하게 된다. 

욕망 이론에서 비판적 혁명을 일으킨 사람은 칸트인데(다시 비판할거 다알아..), 칸트는 욕망을 <자신의 표상을 통해 이 표상의 대상들의 현실성을 야기하는 능력>으로 정의했다.(59) 칸트는 이 예시로 미신적 신앙들, 환각들, 환상들을 얘기한다. 현실적 대상이 외적 기계론에 의해서만 생산될 수 있다해도, 대상의 현실이 욕망에 의해 생산되는 한 그 대상의 현실은 심리적 현실이다. 

욕망이 현실적 대상의 결핍이면, 욕망의 현실 자체는 환상된 대상을 생산하는 <결핍의 본질> 속에 있다. 이렇게 되면 욕망은 생산으로 파악되고 있으면서도 환상의 생산으로 파악되는 것이며, 정신분석에 의해 완전히 설명된 것이 된다. 즉 욕망이 결핍하고 있는 현실적 대상은 그 나름으로는 외부적인 자연적 또는 사회적 생산에 관련되는 반면, 욕망은 마치 <각 현실적 대상 뒤에는 꿈꾼 대상>이 있거나 현실적 생산들 뒤에는 정신적 생산이 있기라도 한 양, 현실을 이중화하게 될 하나의 상상물을 내부적으로 생산한다. (59)

 

욕망이 환상을 생산하는 것으로, 즉 대상이 결핍하는 것을 욕망하는 것이 되면, 결국 욕망이 생산하는 것은 결핍 뿐이다. 클레망 로세는 이를 다음과 같이 정리하고 있다.  

 

욕망의 대상을 정의하기 위해서 굑망이 결핍하고 있던 결핍을 강조하면, 그때마다 <세계는 '욕망에는 대상이 결핍되어 있다'라는 논법에 의거해 어떤 다른 종료의 세계와 자신이 이중화되는 것을 본다. 따라서 세계는 모든 대상을 포함하고 있진 않고, 적어도 하나는, 즉 욕망의 대상은 결핍하고 있다. 따라서 (세계가 결핍하고 있는) 욕망의 열쇠를 포함하고 있는 다른 어떤 곳이 실존한다. (60)

 

이 말은 살짝 생각하거나 상상하는 것, 무의식에 있는 것은 외부에도 무조건 존재한다는 말로 들리기도 하는데, 들뢰즈의 관점처럼 '결핍'이라는 관념으로 욕망을 설명하고자 하는 것에 대한 비판을 하고 있다. 

 


현실계와 욕망적 생산-수동적 종합들 60-63

욕망이 생산한다면, 그것은 현실계를 생산한다. 욕망이 생산자라면, 그것은 현실 속이, 그리고 현실의 생산자일 수 있을 따름이다. 부분대상들, 흐름들, 몸들을 기계 작동하며, 생산의 통일로서 기능하는 수동적 종합들, 욕망은 이런 수동적 종합들의 집합이다. 현실계는 수동적 종합들에서 생겨난다. 현실계는 무의식의 자기-생산으로서의 욕망의 수동적 종합들의 결과물이다.

욕망은 아무것도 결핍하고 있지 않다. 욕망은 자신의 대상을 결핍하고 있지 않다. 오히려 욕망에 결핍되어 있는 것은 바로 주체이다. 또는 고정된 주체를 결핍하고 있는 것이 욕망이다. (60-61)

여기서부터는 들뢰즈가 본격적으로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것 같다. 자신의 이야기를 할 때는 참았던 말을 하는 것처럼 다음 문장이 앞 문장을 보충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문장이 다 중요한 것처럼 핵심적인 말들을 한번에 쏟아낸다. 

욕망과 그 대상은 일체이며, 즉 기계의 기계로서의 기계이다. 욕망은 기계이며, 욕망의 대상 역시 연결된 기계이다. 그래서 생산물은 생산하기에서 채취되고, 생산하기에서 생산물로 가는 중에 뭔가가 이탈하며, 이것이 유목하고 방랑하는 주체에게 여분을 준다. 욕망의 대상적 존재란 현실계 그 자체이다. (61)
심리적 현실이라 부를 수 있을 만한 특수한 실존 형식이란 없다. 맑스의 말처럼 결핍은 없으며, 다만 <자연적이고 감각적인 대상적 존재>로서의 겪음(passion)이 있다. (61)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