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에 대하여
활기 넘치고 복작거리는 집, 모두가 있는 그 곳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들 때가 있다. 혼자 길을 걷다 너무 외로울 때는 독신 거주자가 가장 많을 이 도시에서 나를 뺀 모두가 가족들이 기다리는 집으로 돌아갈 것이라는 환상에 사로 잡히기도 한다. 그러고 나면 곧 적잖이 놀라게 된다. 내가 가장 벗어나고 싶었던 곳이 바로 그 집이었기 때문이다.
무엇이 집을 그렇게 떠나고 싶은 공간으로 만들었을까. 아파트는 죄가 없다. 『이상한 정상 가족』의 저자 김희경은 부모-자녀의 4인 구성 가부장적 핵가족 형태인 ‘정상 가족’이라는 이데올로기가 우리에게 부여된 것을 그 원인으로 꼽는다. ‘정상 가족’이 되기 위해서는 언제나 화목하고 행복한 모습이어야만 하며, 남들이 모두 그렇듯이 특별한 문제가 있어서는 안 된다. 공동 생활에서 불거지는 갈등을 회피하고, 그 안에서 ‘정상적으로’ 살아가는 것처럼 보여지려 애를 써야만 한다. 자녀의 숫자가 늘어나는 것은 상관 없지만, 부, 모와 자녀라는 관계로 구성되어야 하며, 가장은 남다른 의무를 부여받아 가정 내 권력을 행사한다. 결국 한 명의 개인으로 자라나게 될 아이는 가정 내 소유물로 취급받으며, 각종 신체적, 언어적 폭력(‘체벌’로 일컬어지는)과 억압, 명령에 시달린다.
다소 강하게 표현한 바 있지만, 누구나 자라면서 직업, 가족 구성원으로서의 의무 등을 강요받은 적이 있을 것이다. 이 문제는 아이가 자라 사회구성원이 되었을 때도 사라지지 않는다.
프로이트(Sigmund Freud)는 그의 저서 『문명 속의 불만』에서 행복에 비해 불행이 아주 쉽게 경험된다고 말한다. 유한하고 필멸하는 신체, 늘 맞서야 하는 파괴적인 외부 세계, 타인과의 관계에서 오는 필연적인 갈등은 우리를 고통스럽게 만든다. 의식이 자라는 필연적 과정에서 자신의 신체가 어머니나 세계와 일치하지 않고 분리되어 있으며, 외부 세계는 나의 욕망을 더 이상 충족시켜 주지 않는다는 것을 인식하며 불행하다고 느낀다.
나 자신이 아닌 타인을 가장 처음 경험하는 곳이 바로 가족이라는 공동체다. 가족이 아닌 타인과의 관계와 다른 점은 비자발적으로, 극도의 우연으로 형성되어 어떠한 행위로도 변경하거나 멈출 수 없는 운명과도 같다는 점이다. 프로이트는 개인의 리비도가 공동체적 힘으로 대체되며 발전하게 된 문명 최초의 조력자가 바로 가족의 형태로 이루어졌다고 보았다.
원시인들은 타인과의 협력을 통해 스스로의 운명을 변화시켜 나갈 수 있었던 경험을 통해 점차 형제 형태의 무리를 형성했다. 가장 강한 권력을 지니고 아버지 역할을 하던 우두머리를 물리치고, 무리의 권력이 개인보다 강하다는 것을 습득했다. 유아기에 잠시 발동했다가 청년기에 폭발적으로 증대하는 성기적(genital) 리비도는 부부관계를 형성하며 영구적으로 정착했고, 노동력과 서로를 결속시키는 ‘사랑(금지되지 않은)’의 힘으로 가족은 점점 큰 공동체의 형태, 즉 문명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이렇게 우리는 문명 속의 개별 공동체들로 살아가는 운명을 지게 되었다.
타인과의 거리감이 존재하지 않을 것을 요구 받는 가족 공동체 안에서는 필터링 없는 언행과 더 높은 기준치의 배려와 이해 강요로 더 큰 상처를 주고 받기 쉽다. 문명의 발전을 통해 강화된 의미를 덜어내보면, 가족은 단지 혈연 관계로 이루어진 가장 작은 공동체일 뿐이다. 우리는 ‘가족’이라는 공동체 안에서 타인들과의 관계를 경험하면서 살아가는 ‘개인’이다. 모든 가족은 개개인으로 구성되어 있고, 이 관계는 우리가 실제 삶에서 마주하는 현실적인 인간 관계이므로, 가족 구성의 역사나 사회적으로 부여된 의미에 따라서만 판단해서는 안 된다. 가족이 무조건적으로 불행을 유발한다고 단정할 수는 없지만, 이 작은 공동체 안에서 나는 구성원들과 어떤 방식으로 관계를 맺고 있는지, 어떤 상호 영향을 주고 받고, 역할을 하고 있는지 살펴보는 것이 필요하다.
지금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올해의 작가상(2019)을 수상한 작가 박혜수는 “당신의 ‘우리’는 누구인가”라는 제목으로 500여명의 설문조사를 통한 데이터와 마인드맵, “‘우리’ 선언문” 등의 작품을 전시하고 있다. 데이터를 정리한 표를 살펴보면 가장 큰 표본군의 직업은 공무원이고, ‘3. 우리의 속성’ 중 ‘(1) 우리는 다.’ 항목의 빈칸을 높은 비율로 채운 것은 ‘가족’이었다.
국가와 가족이라는 공동체는 ‘우리’라는 소속감을 통해 안정을 느끼게 하지만, 공동체라는 것은 문명이 그렇게 하듯이 훼손하면 안되는 성역 같은 명분 아래 개인을 지우기 쉽다. ‘위기에서 국가는 국민을 보호할 수 있는가?’, ’가족의 위기는 곧 나의 위기, 받아들일 것인가?’와 같은 질문들에서 Yes와 No 중 하나의 선택만을 요구받는 현대인에게 개인주의와 집단주의의 갈등, 가정 내에서는 특히 개인주의 성향이 강한 현재의 20대와 부모 세대 간의 갈등이 심화되는 것은 당연해 보인다.
프로이트에 의하면 “인류 투쟁의 대부분은 개인의 요구와 집단 문명적 요구 사이의 (행복을 가져오는) 적절한 균형점을 찾으려는 단 하나의 목표를 중심으로” 전개되어 왔다. 개인의 힘이 모여 공동체의 힘으로 전환되는 것은 분명 문명의 결정적인 진전이라 할 수 있다. 동물의 삶과 인간의 삶을 구분하고, 자연으로부터 인간을 보호하는 것은 문명의 필요성이자 본질이다.
하지만 문명 밖의 ‘개인’이 무제약적으로 살아가는 것에 반해, 공동체 구성원으로서의 ‘개인’은 자신의 욕망 충족 범위를 스스로 제한한다. 프로이트는 이 또한 문명의 본질로 보았다. 현대인들 중에도 문명을 거부하고 산으로 들어가 자급자족하는 ‘자연인'이 있지만, 더 큰 불행을 막기위해서라도 문명과의 타협, 공동체의 일부가 되는 것은 불가피하다. 하지만 파괴적인 세계로부터, 취약한 신체를 문명을 통해 보호받으면서, 타인과의 관계에서도 ‘행복’할 수 있는 방법은 없는 걸까.
김현경이 지적하는 가정 내 폭력 등의 문제는 ‘정상 가족’ 안에서 더 높은 비율로 발생한다. 미혼모가정, 한부모가정, 다문화가정 등과 같은 ‘비정상 가족’에 투사해왔던 일반적인 인식과 다른 의외의 결과다. 가족에 대한 사회적이고 관습적인 의미부여를 잠시 벗어내 거리를 두고 바라보았을 때, 우리는 우리가 추구하는 진정한 가족의 의미를 회복할 수 있다. 각각의 개별성을 담고 있는 가정 안에서 내가 받은 억압과 추구하는 자유에 대한 재인식이 필요하다.
미디어에서는 이미 ‘가정’과 ‘가족’에 대한 거리두기와 관찰이 실행되고 있다. 독립영화로 13만 명 관람수를 기록한 『벌새』에서는 가부장적 가정 내의 아동이 한 인격 주체로서 유약하지만 강인하게 성장하고 있음을, 『82년생 김지영』에서는 한국 가부장제와 전통적인 남녀차별이 가족내 구성원 모두에게 상처를 주고 있고 충돌과 대화를 통해 조금씩 화해해 나가고 있음을 그려냈다.
박혜수 작품의 설문자들이 ‘우리사회가 당신의 ‘우리’가 되기 위해 갖추어야 할 것’으로 꼽은 것들은 표본크기 중 비율이 큰 순으로 ‘배려’, ‘존중’, ‘신뢰’, ‘소통’, ‘책임', ‘협동', ‘자유’, ‘다양성’, ‘관심’, ‘사랑’이었다. ‘개인’은 답을 알고 있다. 이상적이지만, 개개인 모두가 조금씩 노력한다면 개성을 무시하지 않고 소통하는 공동체로 발전할 가능성이 있다. 가족은 가장 큰 변화의 가능성을 지닌 가장 작은 공동체다.
2019. 10. 28 | Essa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