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써 2016년의 마지막 달이다. 지난 12월 8일은 여전히 전세계인들의 사랑을 받고 있는 비틀즈의 멤버 존 레논의 기일이었다. 존 레논의 아내이자 플럭서스 운동을 주도했던 예술가들 중 한명인 오노 요코는 자신의 페이스북에 레논을 추모하는 글을 올렸다. “1980년 12월 8일, 존 레논의 죽음 이래로 미국에서 120만명을 넘는 사람들이 총기사고로 목숨을 잃었다.”라고 적힌 이미지를 첨부하며 요코는 매일 91명의 사람들이 총에 의해 사망한다며 미국을 다시 평화의 땅으로 돌려놓자는 메세지를 덧붙였다.
오노 요코는 존 레논과 함께 “전쟁은 끝났어요 (당신이 원한다면). War is Over (If you want it).”라고 적힌 대형 포스터를 제작하여 영국 11개 대도시에 부착해 평화의 메세지를 전달했었다. 한국 나이로 올해 84세를 지나보내고 있는 지금도 여전히 전쟁을 반대하고 평화를 이야기하는 오노 요코는 어떤 예술가일까?
1969년 오노 요코는 존 레논과 신혼여행을 떠난 암스테르담 힐튼 호텔 침대 위에서 며칠간 기자들을 불러놓고 인터뷰를 하며 평화의 반전 시위를 했다. 잠옷을 입고 편안한 모습으로 침대 위에서 자연스러운 모습을 보여주었던 그들은 어떤 자극적인 메세지도, 과격한 행위도 없이 신문 일면을 장식하며 세계적인 반전 운동가로 떠올랐다. 단지 자유의 상징으로 여겨지는 장발을 의미하는 “Hair Peace”와 “Bed Peace”라는 글귀를 붙이고 침대 위에서 평화를 노래하는 퍼포먼스를 했을 뿐이다.
미국의 1960-70년대에는 명분 없는 잔혹한 베트남 전쟁에 대한 실태가 드러난 후 그에 반대하는 사람들인 “히피(Hippies)”와 그 문화가 미국 전역을 휩쓸었다. 그들은 기존의 보수적인 가치를 비판하며 “사랑과 평화”의 구호를 외쳤고, 전쟁과 폭력, 획일화된 사회체제 등을 반대했다. 비틀즈의 음악은 그들의 운동을 크게 확산시키는 역할을 했다. 히피들은 무기와 기계에 대비해 자연을 찬미하며 실을 꼬아 만든 프린지 장식을 단 히피 패션을 유행시켰는데, 요코는 그에 더해 레논과 함께 아예 알몸으로 앨범 자켓 사진을 찍는 것을 감행하는 등 자신만의 방법으로 가장 자연스러운 모습을 추구하며 반전과 평화를 외쳤다.
“Play it by Trust, 1966”는 관객이 직접 참여하여 평화와 평등의 메세지를 체험할 수 있는 작품이다. 관객들은 흰색과 검은색의 구분이 없는 체스말을 갖고 직접 게임을 해 볼 수 있다. 처음에는 자신의 말에 집중하여 경기를 진행하는데, 체스말과 체스판이 모두 흰색이라 어느 것이 나의 말이고, 어느 것이 상대방의 말인지 구분이 모호해진다. 결국 이기고 지는 것이 무의미해지며 내가 상대방과 섞여버리는 일체의 경험을 하게 된다.
이는 경험을 통한 깨달음으로 인간과 인간, 인간과 자연 간의 조화를 추구하는 동양적 사상에 바탕을 두고 있다. 오노 요코는 일본인으로 전쟁을 겪고 1952년 뉴욕으로 건너가 생활하게 된다. 스스로 오렌지와 레몬의 교배로 탄생한 ‘자몽 (grapefruit)’이라 규정하며 본인을 “일본여자, 한국여자, 뉴욕여자이자 영국여자다.”라고 말하는 오노 요코는 동양 철학과 사상을 활용하여 관객과 교감하는 작품들을 많이 보여주었다.
요코는 무엇이든 반으로 잘려 있는 방을 보여주며 우리를 하나로 만드는 것에 대해 이야기 한다. 그 방 한 가운데 앉아 있는 요코의 모습은 온전한 하나로 보이지만, 요코는 사람 또한 반쪽이 있어야만 온전히 하나가 된다고 말한다. 반만 남아있는 사물들을 인식하게 되는 순간 우리는 나머지 반을 쉽게 상상할 수 있지만, 존재하지 않는 부분들을 보며 완전히 존재하는 것에 대해 생각해보게 된다.
관객이 직접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 매달려있는 돋보기로 천장에 연결된 액자 위의 조그마한 “YES”라는 글자를 찾아야만 비로소 완성이 되는 작품 “YES painting”은 존 레논이 요코에게 반하게 된 이야기로도 유명하다.
사다리의 높이는 보기에도 꽤나 높아보인다. 그 높이를 직접 올라가는 것도 물론 용기가 필요하지만, 작품에 손을 대고 심지어 발을 대는 행위가 작품을 감상하기 위해 꼭 필요한 행위라는 것은 거대한 전시장 벽에 걸려있고 손을 가까이 가져가면 경보음이 울리는 작품들과는 거리가 있어 보인다. 사다리를 타고 직접 돋보기를 눈에 대고 글자를 찾아내는 과정은 작품을 감상하며 “YES”라는 긍정적 메세지와 함께 일종의 성취감을 느끼게 한다.
요코는 아예 밟기 위한 페인팅 “Painting to be stepped on”을 제작하기도 했다. 전시장 바닥에 설치된 이 작품은 사람들이 지나가며 밟아 헤지고 스러지며 ‘밟는’ 행위와 그 시간의 흔적들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Wish Tree” 시리즈도 마찬가지다. "무언가를 소망하라. 그 소망을 쪽지에 적어라. 쪽지를 접어 소망의 나뭇가지에 매달아라. 친구들에게도 그렇게 하라고 권하라. 나뭇가지가 온통 소망으로 뒤덮일 때까지 소망하기를 멈추지 말라.”라는 지시로 관객들은 자신의 소망을 종이에 적어 소망 나무에 달며 작품에 참여한다. 소원이 주렁주렁 달린 소망 나무는 다양한 관객들이 소망을 적고, 그 종이를 접고, 나무에 매다는 일련의 행위들이 쌓여 하나의 작품이 완성되어지는 과정을 보여준다.
이렇게 관객의 참여와 행위를 중요시하고, 일회적이고 일시적인 순간들을 모두 예술이라 여기며 고급 예술에 반해 매체의 경계를 해체시키는 예술 운동의 경향이 바로 플럭서스(Fluxus)다. 플럭서스는 ‘흐르다’라는 뜻을 가진 라틴어 Fluere에서 유래하였는데, 어원 만큼이나 물체나 물리적으로 규정된 오브제같은 행위의 결과보다 흘러 지나가버리는 행위 자체를 중요하게 여겼다.
변기를 “샘”이라 칭하며 일상적 물건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했던 마르셀 뒤샹에 크게 영향을 받은 예술가들은 “네오 다다이즘”으로 그 계보를 이어나갔다. 이처럼 실험적이고 파격적인 작업을 했던 플럭서스 예술가들로는 존 케이지, 요셉 보이스, 백남준, 구보타 시게코, 조지 마키우나스 등이 있다.
뉴욕의 뉴스쿨에서 실험음악을 가르친 존 케이지는 4분 33초 동안 악기가 아무런 연주 소리도 내지 않는 “4분 33초”라는 음악을 연주했다. 무향실(외부의 소음을 완전히 차단한 방)에서 자신의 혈액이 흐르는 소리를 들은 케이지는 악기가 소리를 내지 않더라도 관객들을 포함해 무수히 많은 소리들이 그 시간에 존재하고, 그 소리들조차 연주가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관객들은 그 공간에 함께 존재함으로 인해 작품에 참여하게 되는 것이다. 예술가의 주체와 관객의 경계가 모호해지는 플럭서스의 예술은 무엇보다 행위, 퍼포먼스의 형태로 존재한다.
오노 요코는 “나에 대한 반감은 적어도 세종류 입니다. 반아시아, 반 페미니즘, 반 자본주의적 반감이지요.”라고 말하며 성 평등을 지향하는 퍼포먼스를 하기도 했다. 무대에 침묵하고 앉은 요코에게 관객들이 차례로 다가가, 요코가 입고 있는 옷을 가위로 자른다. 옷은 가차없이 잘려나가는데 요코는 끝까지 아무말도, 어떠한 반응도 하지 않는다. 이는 남성과 미디어가 여성을 대하는 태도와 여성이 당하는 폭력과 신체의 훼손에 대해서 보여주고 있다.
관객들이 직접 참여하여 그녀의 자유로운 사고와 개념을 생각해 볼 수 있는 작품들을 하며 오노요코는 다양한 방법과 매체를 넘나드는 끊임없이 퍼포먼스로 그녀의 예술 인생을 채워왔다. 침대에 있는 행위, 옷을 자르고, 글자를 찾는 등 일상의 사소한 행위들이 요코에게서는 그녀가 부여한 의미로 하나의 예술 작품이 된다. 우리도 어렵지 않게 페이스북이나 인스타그램과 같은 SNS로 일상을 기록하려는 시도를 하고 있다. 일상의 행위들이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갖는지, 우리는 어떤 퍼포먼스로 우리의 삶을, 하루하루를 채우고 있는지 되돌아 보게 된다.
2016. 12. 11 | Artists | SEOH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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