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가운 바람과 낮은 기온의 본격적인 한파로 들어서는 가운데, 올해 들어 다섯 차례나 청년 실업률 월별 최고치를 경신할 정도로 청년 취업률에도 한파가 몰아치고 있다고 한다. 좁은 취업 시장에서 눈에 띄고, 살아남기 위한 자기소개서를 위한 공부도 따로 해야 할 정도다. 표절 검사를 하면 걸릴 정도로 진부한 표현들을 써서도 안되고, 면접관들을 사로잡을 구체적인 스토리와 기업의 인재상에까지 부합해야 하는 자소서는 나를 ‘소개’하는 것인지 ‘끼워 맞추는’ 것인지 혼란스럽다. 과연 나를 토익 점수나 대외활동 에피소드로 표현할 수 있긴 한 걸까?
얼굴에 석고를 바르고 죽은 토끼를 안고 무슨 뜻인지 이해할 수 없는 말들을 중얼거리는 퍼포먼스를 한 독일의 현대예술가 요셉 보이스(Jeseph Beuys)는 플럭서스 행사에 참여하며 ‘인생경력/작품경력(Levenslauf/Werklauf)’이라는 작품을 소개했다. 여느 이력서처럼 연도와 이력 내용이 적힌 문서였는데 자세히 읽어보면 내용이 이렇게 시작된다.
‘1921 반창고로 상처가 아문 전시회, 클레베(독일의 도시)’
‘1926 사슴안내자 전시회, 클레베’ (보이스가 막대를 휘두르며 사슴들과 어울려 놀았던 경험)
‘1928 참호를 만든 첫 번째 전시회, 클레베’ (보이스가 흙을 파고 놀았던 경험)
‘1929 칭기즈칸 무덤 전시회’ (보이스가 칭기즈칸의 생애에 큰 관심을 가졌음)
(참고자료 - 요제프 보이스 우리가 혁명이다, 송혜영)
보이스는 공식적인 첫 개인전 이전의 어릴 적 자신의 경험과 관심들 또한 자신의 전시회라고 명명한다. 독일의 시골 마을에 살며 동물들과 가깝게 지냈던 보이스의 경험은 보이스의 예술 세계에 영향을 미쳤으며, 칭기즈칸에 대한 관심 또한 그의 작품에 ‘유라시아’ 모티프로 영향을 미친다. 이처럼 삶 속의 다양한 사건과 경험들이 나를 구성하고 지금의 ‘나’를 있게 한 것이다.
자신의 삶을 융합하고 녹여내어 작품에 담아내며 끊임없이 변모해나가는 예술가가 있다. 바로 아프리카와 아랍 모더니즘 예술의 선구자라 불리는 이브라힘 엘-살라히이다.
사막의 색을 닮은 흑백 또는 브라운 계열의의 강한 대비와 독특한 도형들로 구성된 이 그림은 고대의 벽화같이 원시적인 느낌이 들면서도 묘하게 현대 추상화같기도 하다. 여러겹의 면들이 겹쳐져 몽환적이면서 심오해 보이는 원과 반원, 초승달의 기하학적인 도형들은 사람이나 동, 식물들을 형상화하고, 너울거리며 다양한 장면과 스토리를 만들어낸다. 엘-살라히의 추상화는 비현실적인 형상들이 채우는 꿈 속 같아 마치 무의식 속을 유영하는 듯하다.
1930년 영국의 식민지였던 수단 옴드라만(Omdraman)에서 태어난 이브라힘은 영국 런던에 있는 슬레이드 스쿨(Slade School of Fine Art in London)에 장학생으로 가게 될 기회를 얻었다. 그곳에서 영국식 교육과 유럽 모더니즘 예술을 접하게 되었고, 위대한 예술가 세잔과 몬드리안 등 유럽 모더니즘 예술가들에게 큰 영향을 받게 된다.
영국의 식민지에서 수단이 독립한 후, 수단으로 돌아간 이브라힘은 60년대 말부터 70년대 초까지 수단의 정부문화기관에서 일하다가 반정부 세력에 의해 구치소에 6개월 동안 수감되며 고된 생활을 하기도 했다.
석방 된 후, 카타르에 20여년 간 자진 망명하여 살던 엘-살라히는 영국 옥스포드로 건너가 현재까지 활발한 작업을 하며 살아가고 있다. 오아시스를 찾아 사막을 떠돌아다니며 살아가는 유목민처럼 그는 이곳저곳을 떠돌아다니며 여러 형식이 혼합된 자신만의 회화언어를 발전시켰다. 순탄치 않은 삶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엘들-살라히의 예술에 대한 열정은 식지 않았고, 오히려 여러 문화들을 수용하고 자신만의 것으로 만들었다.
작품 전체를 흐르고 있는 듯한 곡선은 초승달 무늬로 가장 잘 드러난다. 엘-살라히의 그림에 자주 등장하는 초승달 모양은 이슬람 문화의 큰 특징 중 하나이다. 이슬람 종교에 따르면 마호메드가 알라신에게 최초의 계시를 받을 때 초승달과 샛별이 떠 있어 ‘진리의 시작’이라는 의미를 갖게 된 초승달은 ‘알라’를 상징하는 심볼이다. 또한 수단과 같이 사막으로 이루어진 지형에서는 달빛이 적은 초승달의 모습일 때 길을 잃지 않게 인도해주는 별들이 가장 잘 보여 더욱 중요한 의미를 갖게 되었다고 한다.
‘The tree’ 시리즈는 ‘Haraza Tree’라는 수단 고유의 토착 나무에서 영감을 받았다. 나일강변에 자라는 아카시아 나무인 하라자 나무는 비가 많이 오는 우기에는 잎이 하나도 없는 상태로 있다가 건기에 들어서면서 초록빛 새순을 틔우며 꽃을 피우는 독특한 나무다. 보통 식물들이 우기에 우거지고 활발하게 자라는 것과는 조금 다른 모습이다. 엘-살라히는 이런 특이한 습성의 하라자 나무를 볼때면 나무가 ‘나는 나야! 나는 모두가 하는대로 따라하지 않을거야! 모두가 푸르게 변할 때, 그들이 푸르도록 내버려 둬. 하지만 나는 아니야!”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고 한다.
‘The Tree’시리즈는 계속해서 변모의 과정을 거치는데, 나무 기둥과 가지가 점점 단순화되어 기하학적인 형상을 띄게 된다. 그림에 등장하는 강렬한 원색은 얇은 펜으로 일일이 채워넣은 결과물이라고 한다. 이런 단순화 과정은 몬드리안의 “나무 연작”을 연상시킨다. 몬드리안이 세상의 본질을 수직과 수평의 구조로 이루어졌다고 본 것과 같이 엘-살라히도 세상을 구성하는 기본적인 요소로 본질을 탐구하고자 했다. 수직, 수평선으로 단순화되는 나무의 구조는 ‘몸(Body)’을 은유적으로 표현하며 창조자와 피조물, 정신적 세계와 현상적 세계를 연결하는 고리로 생각했다.
작은 색면들과 얇은 선으로 이루어진 수많은 변형들과 미묘한 차이들이 숨어있어 마치 하나의 패턴처럼 보이는 그림은 아랍 예술의 진수인 아라베스크(Arabesque) 문양을 떠오르게 한다. 신의 무한한 완전성을 그림으로 나타낼 수 없다고 생각하여 아랍 예술은 구체적인 형상을 거부하고 추상적이고 장식적이며 화려한 기하학적 무늬로 발전해 나갔다. 작은 단위들이 반복되어 하나의 커다란 장식 형태를 만들어내는 패턴들은 일시적이고 끊임없이 변하는 현세와 맞닿아있으며 덧없는 삶과 현실을 의미한다고 한다.
엘-살라히는 이처럼 초승달 문양과 수단 토착 나무인 하라자 나무를 조형언어로 바꾸어 자신의 작품을 구성하는 등 자신의 문화와 정체성을 작품에 담아내고 있다. 그는 아프리카에 위치한 아랍국가의 예술가로서 민족적인 예술과 미학을 창조하기 위해 애썼다. 특히 그의 아버지가 필사한 쿠란(Quran, 이슬람교 경전)의 아랍 특유의 서체는 그를 매료시켜 작품 전반의 물결치는 듯한 곡선과 그림위에 쓰여진 글씨들로 드러나며, 아프리카의 전통 수공예품과 장식품들의 원시적이면서 독특한 형상들도 투박한 양감과 향토적인 색깔로 드러난다.
엘-살라히처럼 자신의 문화와 삶을 혼합하여 새로운 자신만의 조형언어를 만들어낸 아프리카 출신 예술가가 있다. 잉카 쇼니바레(Yinka Shonibare)는 나이지리아 출신인 부모님으로부터 영국에서 태어났고, 나이지리아에서 자랐으며, 영국식 학교에서 영국식 교육을 받았다.
쇼니바레의 작품은 더치 왁스(Dutch Wax)라는 섬유로 이루어져 있다. 더치 왁스는 아프리카 인들이 아주 좋아하고, 예전에 국기가 없어 대신 흔들기도 했을 정도로 아프리카 인들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천이다. 누가봐도 아프리카가 떠오르게끔 하는 그 천은 사실 인도네시아가 원산지이며 네덜란드를 통해 유럽으로 들어왔다가 아프리카로 전해지게 되었다고 한다. 쇼니바레의 작품은 다양한 문화의 교류와 흐름이 만들어낸 또 하나의 언어이다.
내가 태어난 나라와 문화, 심지어 나의 핏줄과 생김새가 나의 정체성을 온전히 대변하지는 못한다. 엘-살라히는 아랍 문화와 수단 고유의 토착 식물, 아프리카 전통 조각들과 유럽의 모더니즘 예술을 결합하여 자신만의 새로운 양식을 만들어냈다. 끊임없이 작품 형식을 변모해 나가는 그의 열정또한 본받을 만 하지만, 삶의 경험들을 통해 다른 누구도 아닌 나 자신만의 무엇인가를 창조해내는 모습은 이력서에 적어두었던 내가 아니라 진짜 나의 모습을 바라보게 하는 것 같다.
이브라함은 “그림은 거울과 같다. 한 사람을 자기 자신으로 돌아가게 하는 수레이며, 내면에서 진짜 자기를 발견하도록 하며, 명상을 시작하게 한다.”라고 말한다. 핸드폰이나 컴퓨터로 생소한 아랍 예술가가와 작품을 쉽게 만나는 것처럼 우리는 문화가 혼재되고 경계가 모호해지는 현대사회를 살아가고 있다. 다른 문화를 수용하고 경험하며 마음을 열고 더 단단하게 빛나고 있는 ‘나’를 발견하기를 바란다.
2016. 12. 19 | Artists | SEOH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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