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여름 전 세계를 강타했던 포켓몬 고(Pokemon go) 게임이 드디어 한국에서도 플레이가 가능해졌다. 어릴 때 봤던 편을 또 보며 많은 시간을 함께 했던 포켓몬스터 만화영화의 캐릭터들이 내 방 침대 위, 근처 공원, 가는 곳 어디든지 출몰해 직접 몬스터볼을 던져 잡을 수 있다. 팀을 정해 곳곳에 위치한 체육관에서 진화시킨 포켓몬으로 대결도 할 수 있다. 핸드폰 화면 속만을 헤엄치던 사람들이 포켓몬을 잡기 위해서 집 밖으로 나오고 밖에서 만난 사람들과 소통하기 시작했다. 증강 현실(Augmented Reality) 기술을 통해 또 하나의 새로운 문화가 형성되기 시작한 것이다.
증강 현실(Augmented Reality, AR) 기술은 현실의 이미지나 배경에 3차원 가상 이미지를 겹쳐서 하나의 영상으로 보여주는 기술을 말한다. 그래서 내 스마트 폰을 통해 세상을 보면 내가 다니는 길 곳곳에서 포켓몬들이 살아 움직이는 것을 볼 수 있다. 현실의 이미지 위에 포켓몬 캐릭터 이미지가 더해져 이전에는 없었던 완전히 새로운 세상이 된 것 같다. 이렇게 다양한 기술들을 적용하고 여러 이미지들을 겹쳐 회화로 표현한 현대 예술가가 있다.
바로 시그마 폴케(Sigmar Polke)이다.
1941년 폴란드에서 태어난 폴케는 가족들과 함께 분단되어 있던 독일 동독에서 자랐다. 이 후 베를린 장벽이 설치 되기 전인 1953년 서독에 위치한 뒤셀도르프로 이주해 미술을 공부하며 독일의 역사를 깊이 체험하게 된다. 당시 공산주의 체제하에 있던 동독에서는 국가의 공동 이데올로기 교육과 집단적 의식을 주도하고자 하는 사회주의 사실주의 그림들이 많이 그려졌다. 그런 그림들 속 사람들, 주로 노동자들은 적극적이고 이상적인 모습을 하고 있었다.
폴케는 뒤셀도르프 미술학교에서 공부하던 게르하르트 리히터(Gehard Righter)와 콘라드 뤽(Konrad Rueg), 만프레드 쿠트너(Manfred Kuttner)와 함께 ‘자본주의 사실주의’라는 전시를 기획했다. 미국의 팝 아트(Pop Art)에 영향을 받은 독일의 젊은이들이 동독의 현실을 비판하기 위해 사회주의적 사실주의의 패러디 격인 개념을 만들어 낸 것이다. 독일의 팝아트를 주도하게 된 이들은 자본주의가 가져다 준 물질적인 풍요로움이 서독의 사람들을 어떻게 규정하는지를 이미지를 통해 보여주고자 했다.
이들은 잡지나 신문과 같은 대중 매체의 이미지들을 차용하여 여러 변형을 주어 새로운 이미지를 만들어냈다. 일상의 소재들을 회화에 그대로 이용해 전쟁 직후 독일의 사회를 풍자적으로 고스란히 드러냈다. 즉흥적으로 전시를 하기도 하고 해프닝을 곁들이기도 한 이들은 개별적으로 서로 다른 방식의 작업을 했지만, 이들이 사용한 ‘자본주의적 사실주의’라는 개념은 독일 미술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개념이 되었다.
시그마 폴케는 “우리는 언젠가 좋은 그림들 -좋은 이미지들-이 그려질 수 있다고 확신해야 한다. 그리고 우리 자신이 그 일을 맡아야 한다.”라고 말할 정도로 회화에 있어서 끊임없는 실험과 탐구를 했다. 폴케의 회화에서 드러나는 가장 특징적인 면은 리히텐슈타인에게 영향을 받은 망점들이다. 리히텐슈타인은 만화에서 빌려온 형식으로 그림을 그린 미국의 팝아티스트이다. 만화 인쇄의 과정에서 드러난 망점들을 이용해 자신만의 독특한 표현 기법인 벤 데이 도트(Ben day dot)를 만들었다.
폴케는 이런 망점들을 수작업으로 표현하면서 자본주의의 결과물로 이미 생산된(Ready made) 다양한 패턴들이 수놓아진 패브릭을 이용하였다. 확대되어 망점들이 드러날정도로 선명하지 않아 보이는 서로 다른 이미지들을 겹치기도 하고 물감을 붓거나 찍어내거나 흘려내리는 등 여러가지 표현 방법을 실험했다. 또한 ‘통계에 따르면 독일인은 1인당 10,000가지의 물건을 소유하고 있다’, ‘고귀한 존재는 그들의 향기가 불과 몇 센티미터 안에서만 나고 손이 닿을 거리에서만 포착할 수 있다’, ‘숯을 한 덩이 집어 넣으면 꽃병의 물에서 냄새가 나지 않는다’, ‘미지의 세계에서 온 음악 : 문을 막고 그 공간에 발을 들이지 말 것’, ‘당신은 항상 당신의 눈을 믿을 수 있는가?’ 등 길고 독특한 제목을 붙여 이미지와 텍스트 간의 관계에 대한 실험을 하기도 했다.
폴케는 뒤셀도르프 미술대학에 들어가기 전에 스테인드글라스 공장에서 일했던 경험을 바탕으로 화려하고 선명한 컬러들을 사용했다. 취리히의 그로스뮌스터 성당의 채광창을 스테인드글라스로 장식하기도 했다. 또한 회화에 금속 가루나 화학 약품을 사용하여 색다른 효과들을 얻어내기도 했으며, 유리에 그림을 그리는 등 회화의 수단에 제한을 두지 않았다.
이렇게 폴케의 그림들은 현실과 가상의 이미지가 확실하게 구분되지 않고 모호하게 혼재하고 있다. 망점들이 드러나보이는 이미지들은 사진임에도 불구하고 비현실적으로 보이기도 한다. 투명하게 겹쳐진 색면들과 아래에 위치한 사진과 그림이 은은하게 드러나기도 하고, 뿌려진 강렬하고 대범한 물감 자국들로 화면을 자유자재로 구성하는 폴케의 대담함은 더욱 심층적인 신비로움을 연출하는 것 같다.
모든게 뒤섞여보이는 폴케의 그림들은 다면적이고 다층적인 현실을 반영하고 있다. 순수한 회화 자체를 추구하던 모더니즘의 추상회화에서 사회와 정치와 같은 현실을 도입하고, 보다 자유로운 표현으로 인간의 내면을 깊이있고 심층적으로 다룬 독일의 신표현주의를 대표하는 화가 중 한명인 시그마 폴케는 국경과 인종, 성별을 초월하는 새로운 현실을 꿈꾸며 작업하고 있다고 한다.
요즘 사회에서는 수없이 많은 이미지들을 비판 없이 무방비상태로 수용하게 되었다. 지금, 우리는 과연 정치적, 사회적인 목적이 전혀 없는 이미지들을 받아들이고 있는 것일까? ‘오직 회화를 위한 시간만이 존재한다 There is no time, only for painting’라고 말하는 폴케의 그림들을 통해 우리가 받아들이는 이미지에 대해서 한 번 생각해 보는 것은 어떨까 한다.
2017. 01. 30 | Artists | SEOH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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