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는 삶이 고통이라고 말한다. 실존주의 철학자 쇼펜하우어는 삶이 고통의 연속이라고 말한다. 붙잡아 둘 수 없이 흘러가는 시간과 한정적인 물질 세계 속에서 살아가는 삶은 고통이라고 할만 한 것 같기도 하다. 잠시 즐거움과 행복을 찾더라도 나를 괴롭게 하는 고통과 두려움은 어느새 다시 나에게 찾아온다.
그렇다면, 우리는 고통스러운 삶 속에서 살아야만 하는 것일까?
부처는 고정된 나의 모습에 집착하는 것을 버리고 팔정도를 따름으로써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말했고, 쇼펜하우어는 환경이나 주변이 아니라 현실을 대면하고 나의 내면에서 행복을 찾아야 한다고 말했다. 한 예술가는 자신의 괴로움을 작품으로 승화시키면서 고통을 정화한다. 우리에게는 거대 거미 “마망 Maman”으로 잘 알려진 루이스 브루주아(Louise Bourgeois)다.
루이스 브루주아는 독자적인 예술 세계를 추구하며 99세의 나이까지 열정적으로 작업하던 프랑스 예술가이다.
태피스트리를 직조하는 가업을 도우며 성장한 어린시절은 부유했다. 하지만 친밀하게 지내던 가정교사와 아버지의 불륜을 목격하게 되고 큰 충격을 받는다. 루이스는 아버지에 대한 증오와 두려움, 사회적 분위기에 따라 그 관계를 묵인할 수 밖에 없었던 어머니에 대한 연민으로 고통스러워 했다.
루이스는 대학에서 정신적인 불안감에서 해방되고 싶었기 때문에 추구했던 안정적이고 탄탄한 구조의 기하학과 수학을 전공하게 된다. 하지만 기하학과 수학은 그녀의 정신적 불안을 해소할 수 없었고, 방법을 찾던 루이스는 그림을 시작한다. 1938년, 미술사학자인 남편 로버트 골드워터를 만나 프랑스에서 뉴욕으로 이주하게 되고, 그 때부터 그녀는 자유롭고 활발하게 예술작업에 몰두한다.
“아버지의 파괴 The Destruction of the Father, 1974”는 아버지에 대한 증오심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붉은 빛의 조명 아래 중심에는 테이블이 놓여있다. 루이스는 이 작품을 이렇게 설명한다. “아이들은 아버지를 잡아 테이블에 올려요. 테이블 위의 아버지는 음식이 됩니다. 아이들은 음식을 뜯어내고, 갈기갈기 찢어서 먹습니다. 아버지는 아이들에 의해 완전히 해체되죠. 가운데 조각은 테이블과 침대 두가지를 모두 의미해요.”
루이스는 이 작품을 60여년 전 저녁식사를 떠올리며 작업했다고 한다. 루이스의 아버지는 그의 권위를 내세우곤 했고, 여성으로 태어난 루이스를 무시하고 조롱하기 일쑤였다. 아버지에 대한 기억들 때문에 루이스에게 남성은 부정적이고 두려움의 대상으로 자리 잡았다. 어쩌면 조금 잔인하게 들릴지도 모르는 작업을 통해 루이스는 아버지라는 남성이 가지는 권위와 그에 대한 두려움에 맞서고, 그 두려움을 해체하고자 했다.
반면, 어머니를 떠올리며 작업한 엄마 거미 “마망 Maman”은 모성애와 어머니에 대한 연민이 잘 드러난다. 거대한 거미 모양의 청동 조각은 높이가 3.7m에서 9m에 이르는 것도 있다고 한다. 거대한 규모와 딱딱하고 차갑게 느껴지는 청동소재의 기괴한 모습의 다리는 위협적으로 보이기도 한다. 그 규모를 감당할 수 없을만큼 가늘어 보이는 다리는 유약해 보이지만, 청동이라는 소재를 잊게 할 만큼 조각을 가벼우면서도 유연하도록 보이게 한다. 뱃속에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알을 품고 있는 거대한 엄마 거미의 여덟개의 다리 아래의 어머니의 품과 같은 공간은 부드러우면서도 강인한 힘이 느껴진다. 전 세계 9곳에 설치되어 있고, 순회 전시도 하고 있는 거미 마망 Maman은 한국에서는 리움미술관에서 새끼거미와 함께 만나볼 수 있다.
“여성-집 Femme Maison, 1994”에서는 루이스가 가진 여성관이 잘 드러나는데, 대리석으로 조각된 여성의 얼굴의 위치에 집이 자리하고 있다. 가부장적인 집에 갇혀있는 당시 프랑스 여성들을 형상화했다. 이 또한 어린시절의 어머니에 대한 기억이 반영된 것이다. 140cm의 작은 체구의 루이스는 어마어마한 규모의 거미 조각을 만들어내고, 청동과 대리석 등 무거운 소재를 사용했다.
루이스는 현실을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직면하고 받아들이면서 물질적인 형태로 만들어내는 과정을 통해 두려움을 승화시키고 현실에서 벗어나는 돌파구를 찾아낼 수 있었다. 그는 돌을 쪼아내고 나무를 다듬는 조각의 과정을 통해 두려움을 다시 체험하고, 조각으로 물리적인 형태를 만들어냄으로써 그 두려움에서 벗어나고자 한 것이다.
가업인 태피스트리 직조를 어린시절부터 접하면서 루이스의 작업에 많이 등장하는 실과 바늘을 이용한 작업도 마찬가지다. 그는 바늘이 공격적인 성질의 핀과 달리 파괴된 것들을 이어붙이는 유용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바느질로 천을 이어붙이고 꿰메는 과정에서 루이스는 자신의 상처를 이어붙이고 용서와 포용을 통해 상처를 치유하고자 했다. 천들이 모여 만들어지는 형태들은 부드럽고 도톰한 신체의 형상을 많이 띄고 있다.
루이스는 자신의 경험들을 공간 자체로 조각하기에 이르렀는데 “작은 방 Cell” 연작에서는 이런 조각과 바느질 등이 종합적으로 결합된 형태를 띄게 된다. “붉은 방 Red Room, 1994”은 붉은 빛의 침대 위에 아이 베개와 레일이 끊어진 장난감 기차, 오른편의 새장과 대칭을 이루는 구조를 통해 어린시절의 기억을 재현하고 있다. 방 시리즈는 여러 상징적인 요소들이 배치되어 정신분석학적으로 해석되기도 하는데 재구성된 방에서 유년시절의 억압과 강박관념이 드러난다고 한다.
철장으로 둘러싸인 완전히 밀폐되지도 완전히 개방되지도 않은 하나의 공간은 형태가 존재하면서도 에너지가 드나드는 내면의 모습을 형상화한 것처럼 느껴진다. 관객들은 방 가운데의 신체를 여러 각도에서 비춰주는 거울을 통해 내면을 다양한 각도로 들여다 볼 수 있다. 원형으로 된 방 가운데 나선형으로 올라가 방에서 탈출하게 되는 “Cell (The last climb), 2008”은 내면을 고양시키고 성장해나가는 모습이 연상되기도 한다.
남성과 여성이라는 성에 관심이 많았던 루이스는 서로 상반되는 성질이 융화되고 혼재된 양성적 이미지의 작품들을 많이 만들었다. 또한 남성과 여성의 만남, 정신적이고 육체적인 사랑을 주제로 많은 작업을 하기도 했다. “I Wanted to Love You More, 2009-2010”은 트레이시 에민과 함께 콜라보래이션 작업을 한 그림이다.
커플이라는 제목을 가진 작업들을 보아도 루이스의 작품은 아름답다고 말하기 힘들다. 이곳에 다 담지 못한 많은 작품들은 오히려 너무 적나라하고 사실적이다. 삶에 아름다운 면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지만 추상화된 현실의 모습은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불쾌감을 주기도 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비극이 공포와 연민의 감정을 불러일으키고, 이를 정화해준다고 말한다. 바로 카타르시스(정화)다. 루이스는 몸, 자연, 여성, 어머니, 사랑, 두려움, 고통, 과거와 현재, 미래라는 시간과 공간 등 개인적 삶의 모든 것을 다루며 현실을 직면하고 두려움을 몸소 다시 체험한다. 고통을 마주하고 정화하는 것이다.
“예술은 카타르시스다. 내가 경험한 상처, 증오, 연민을 표현하고자 한다.”라고 이야기하는 루이스는 삶이 고통이라고 말한다. 지금 나를 괴롭게 하는 고통이 무엇인지 살펴보고 직면해본다면 내면에서 카타르시스와 함께 고통을 이겨낼 삶의 에너지가 솟아나지 않을까.
2017. 02. 13 | Artists | SEOH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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