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출신 영국에서 활동하는 포토그래퍼 볼프강 틸만스는 영국의 유럽연합 탈퇴, 브렉시트(Brexit, British withdrawal from the European Union)를 반대하며 만든 포스트 여러장을 인스타그램(Instagram)과 개인홈페이지(http://www.tillmans.co.uk)에 게시했었다. 자신의 사진을 바탕으로 “No man is an island. No country by itself.”와 같은 문구가 씌여진 포스터는 여러가지 버전으로 제작되었고, 틸만스는 사람들이 이 포스터를 자유롭게 가져가 퍼뜨릴 수 있도록 했다.
“나는 내 나름의 이상적인 아름다움에 대한 생각과 내가 살고자하는 세상에 대한 그림을 그리고 싶다.”
예술가들이 잘 사용하지 않는 SNS를 통해 정치, 사회적 이슈들을 다루고 작업에 반영하는 그는 스스로를 정치적 예술가로 본다. 주변의 일상적인 삶과 세계의 다양한 모습들로 자신의 세계와 사회를 이야기 하는 틸만스는 동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을 비추는 거울 같은 예술가이다.
틸만스를 가장 유명하게 한 사진들은 1980년대 후반 영국 하위 문화인 컬트(Cult) 문화를 담은 사진들이다.
그는 어린시절을 독일 함부르크에서 보내다가 1983년 어학연수로 런던으로 가게 되고, 컬트 문화를 접하게 된다. 컬트 문화는 특정 생활 방식이나 태도, 사상 등을 열광적으로 추종하는 사람들이 지닌 문화를 말한다. 지금은 지나친 분류이겠지만, 게이나 레즈비언, 펑크족들이 당시 시대를 대표하는 컬트 집단이었다. 틸만스는 이런 솟아오르는 에너지에 매료되었고, 특히 클럽의 사람들과 청춘을 열광적으로 만끽하는 젊은이들을 대상으로 사진을 찍었다.
그의 사진들은 당시 젊은이들의 문화를 잘 반영하고 있던 영국 라이프스타일 잡지 <i-D>에 실렸고, 거침없고 솔직한 그의 사진들은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게 된다. 낸 골딘이 미국의 언더 문화의 삶에 참여하고 그들을 사진에 담은 것처럼, 틸만스 또한 동성연애자인 친구들과 그들의 내밀한 삶 속에서 사진을 찍었다. 그는 길거리의 노숙자나 인종차별 등 민감한 사회 문제와 일탈의 문제에 관심을 가지며 꾸준히 동시대 현대사회의 면면을 보여주었다.
1996년 런던에 정착해 본머스 & 풀 예술디자인학교(Bournemouth and Poole College of Art and Design)에서 공부한 볼프강 틸만스는 2000년에 최초의 사진가로 영국 테이트 브리튼(Tate Britain)에서 주관하는 터너 상(Turner Prize)을 수상하기도 했다. 한 해 동안 가장 주목할 만한 전시나 프로젝트를 보여주는 젊은 영국 미술가에게 수여되는 상인 터너 상을 수상한 최초의 영국인이 아닌 사람이기도 하다.
틸만스는 현장 스냅으로 찍던 사진들에서 조금 템포를 늦춰 정물 사진에도 관심을 가졌다. 원래 흐트러져 있었는지, 일부러 배치를 한건지 알 수 없는 묘한 긴장감을 불러일으키는 그의 정물은 스쳐지나가기 쉬운 일상의 아주 사소한 순간을 포착한다. 틸만스는 모든 정물들이 완전히 자신이 구상한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그가 일상에 펼쳐진 스테이지에 연출을 시작하면, 알아차리지 못했던 것들이 발견되고 예기치 못한 긴장감과 이 전과는 다르게 느껴지는 완전히 새로운 오브제가 생성되는 것이다.
그의 정물은 그가 삶을 바라보는 시각을 대변하기도 한다. 테이블 위의 과일들과, 남겨진 껍질들, 흐트러져 있는 천의 모양새와 화분과 작은 식물들은 화면 안에서 리듬과 나름의 조형적 미를 구성하며 하나의 콤포지션(구도)으로 완성된다. 한 발짝 앞으로 나가거나 뒤로 가면 그 콤포지션은 완전히 다른 구도로 변모하게 되며, 우리 삶은 이런 수없이 많은 콤포지션들로 이루어져 있다. 순간의 인상을 담아내는 스케치나 크로키로는 온전히 담아낼 수 없는 선명한 현실의 감각, 이렇게 순간이 지나면 변해버릴지 모르는 긴장이 틸만스의 사진에 현장감을 부여하는 것이다.
이런 현장감은 풍경 사진에서 보다 돋보인다. 거대한 폭포가 우렁찬 소리와 안개를 내뿜으며 쏟아져 내리는 듯한 순간, 붉은 빛으로 휩싸여 고요하면서도 불안한 감정을 고조시키는 적막한 공기, 넘실거리며 눈 앞으로 다가오는 것 같은 파도가 그러하다. 이런 사진들은 아름다운 색채들로 거대하게 프린트되어 전시되었다. 특이한 점은 한 벽면을 가득 채울정도로 거대한 사진을 전시하면서도 그만큼 거대한 액자를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개의 압정으로 꽂아둔 것이다. 금방이라도 압정을 빼내 어딘가로 옮겨 새로운 장소에 또 새로운 순간들을 만들어내려는 것처럼 틸만스의 작품들은 압정이나 테이프로 살짝 고정되어 있을 뿐이다.
사진이 등장한 후 사실적인 재현을 그만두고 인간의 정신과 내면의 세계에 집중하며 발전하던 추상화는 회화만이 가진 특수하고 특징적인 개념이었다. 1990년대 이후 틸만스는 추상을 사진으로 구현해내게 되었다. 디지털 카메라를 사용하기 전, 콘탁스 SLR(싱글 렌즈 리플렉스 카메라)을 사용하며 암실 작업을 하는 도중에 의도치 않은 오류로 생긴 얼룩들은 마치 추상표현주의의 그림들 중 섬세한 버전으로 보이기도 한다. 이처럼 그는 다양한 맥락에서 해석되는 사진의 가능성을 실험하는 데 관심이 많았고, 사진의 한계라는 틀을 깨부수고자 했다.
매 전시마다 전시장 모형을 만들어 자신의 작품들을 직접 배치해보는 작업도 마찬가지로, 사진 이미지가 가지는 기능과 전시장에서의 배열에 따른 결과를 고민하는 같은 맥락의 작업이다. 틸만스는 전시를 기획하는데도 뛰어난 능력을 보였는데, 이러한 작업 또한 자신의 예술작품으로 여겼다.
엽서나 잡지에서 찢어낸 사진과 잉크젯 프린터의 출력물, 고급 컬러 인쇄물 등 크기와 인쇄 재질이 천차만별인 사진들을 일렬로, 나란히, 같은 간격으로 배치하지도 않았다. 겹치기도 하고, 모으기도 하고, 퍼뜨리기도 하고, 불규칙하게 나열된 사진들은 보는 이로 하여금 그 나름대로의 새로운 맥락을 생성해내게끔 한다. 거대한 사진에서 작고 소소한 사진들로 거침없이 변화해 나가는 전시는 역동적이고 적극적인 관람을 선사한다. 관람객들은 커다란 사진을 멀리서 바라보다가 모여있는 작은 사진들을 이리저리 둘러보고 각자의 내러티브를 읽게 된다. 지금은 우리에게 너무 익숙해진 틸만스의 작품 배열 방식은 당시 젊은 예술가들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
그는 자신의 작품을 해석하는 데 정답이 없다고 말한다.
관람하는 사람들이 “나도 이 냄새 알아!”, “아, 이 소리~”, “나도 이 거 본 적 있어!”, “공감되는 것 같아”, “아, 어떤 느낌인지 알겠다.” 와 같은 반응을 보인다면 성공한 작품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사람들이 전시장에 배열되어 있는 사진들을 보며, 사진에 담겨있는 순간들 뿐만 아니라 바로 지금 이 순간을 경험하기를 바란다.
마침 테이트 모던에서 지난 15일 부터 올해 6월 11일 까지 <Wolfgang Tillman : 2017> 전시를 하고 있다고 한다. 그의 역동적인 전시와 사진의 매력을 통해 일상의 낯선 아름다움과 순간의 감각을 경험해 보기 좋은 기회일 것이다.
2017. 02. 20 | Artists | Seoh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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